경술국적
경술국치를 주도했던 나라팔아먹은 8명의 쓰레기들
이완용
가장 먼저 누구나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완용이다 이놈의 업적은 너무 화려하다
기계같고 기회주의자같은새끼라 늘 이리붙었다 저리붙었다하는 전형적인 간신배 처음에는 친미 그다음은 친러 마지막은 친일짓을 했다.
게다가 이놈이 황실을 보호했다 그러는데 이토히로부미와 함께 고종을 협박하여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허수아비로 세운것도 이놈이다
충성심? 그런건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자기 이익을 위해 일했을뿐 나라를 바꿀 생각도 없고
오직 한국인은 미개하다 이것만 주구장창 주장하면서 일본에 나라 팔아먹는걸 정당화 시켰다
그 뒷일은 알다시피 현재돈으로 약 450억정도 되는 재산을 보유하고 한반도에서 2번째 가는 부자엿다고 한다
이놈이 얼마나 악질 매국노였으면 중화민국 시절에 양사이(梁士詒)가 외세에 아첨하는새끼들을 이완용에 빗대어 조롱했을 정도다
그리고 유일하게 <을사오적+정미칠적+경술국적> 3개 모두 들어가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쓰레기중 트리플 크라운 음식물 쓰레기다
윤덕영
이 놈은 은근 황족들과 관련이 깊은 인물로 조상은 선조의 부마였고
자기는 순종의 두번째 황후였던 순정효황후의 백부였던 놈이다
이놈은 이토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죽자 앞장서서 장례를 진행시켰고
을사늑약때는 황제가 가지고 있어야할 옥새를 협박해서 뺏은다음 그걸로 찍어버린 개자식이다 덕분에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역시 경술국치때는 한일병탄 조약때 순정효황후가 이딴 조약은 말도 안됀다면서 치마밑에 옥새를 숨겼는데
그걸 이놈이 강제로 황후한테서 무력으로 탈취했다
그리고 가장 극에 달하는건 이놈이 고종 독살에 아주 중추적인 역할로 한상학과 같이 독이 든 차를 궁녀에게 전해 고종을 암살한거다
예로부터 황족들과 관계가 깊었던 윤덕영은 자기 나라를 판것도 모자랐는지 자기 주군마저 죽이는 역적이 되었다
민병석
이놈은 민비의 친척으로 인맥덕에 관료가 된놈이다
역시 정식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벼슬자리에 오른새끼가 정치를 잘 할리가 없지 평안도 감찰사로 있을때
백성들은 존나 수탈해서 원망이 샀고 이에 조병세가 얘 탄핵 시켜야 한다고 까지 주장할정도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였는대 (원래 여흥민씨들은 반일이였음)
청일전쟁때는 청나라편에 서서 일본을 몰아내기를 주장했었다 이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힘이 약해지자 이완용과 같이 친러파로 갈아탔다
이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자 자발적으로 조문을 갔고 또 메이지 일왕이 죽었을때도 조문을 갔다
그리고 당시 황태자였던 영친왕을 강제로 일본년이였던 마사코(이방자)와 정략 결혼 시켜버렸다
그리고 1910년에는 앞장서서 나라를 팔아먹었다
고영희
위에 3놈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였지만 이놈은 진골 친일파였던놈으로 무려 강화도조약 이후부터였던 골수친일파였다
그래서 일본의 간섭이 강하게 작용했던 갑신정변에도 개입하였는데 이에 실패로 돌아가자 잠깐 몰락했다 갑오경장에 참여하면서 복귀하였다.
이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아예 나라 팔아먹는 방향으로 바꿨고 을사늑약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2차 을사늑약이였던 한일신협약에 참여하여 헤이그 특사를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 시켜버리는 정미칠적이 되었고
이후엔 나라를 아예 팔아먹는 경술국적이 되었다
박제순
고영희가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들었다면 이놈은 을사오적과 경술국적 두개를 달성한 더블쓰레기다.
58년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83년에 정계에 진출했다. 89년에는 대한제국과 청나라가 조약을 맺을때 대표로 참여했으며
1901년에는 벨기에와 통상조약을 맺을때도 기여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시대에 휩쓸린 비운의 관료가 될 뻔 했지만
1905년 을사늑약에 체결할때 외부대신의 직위를 이용해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옹호했고 결국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역적이 되었다.
그리고 1907년때 정미조약때는 중추원 고문관이였고 1909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내부대신으로 열심히 똥꼬 빨면서 지내다.
이완용이 독립투사였던 이재명에게 칼에 찔리는 사고를 당하자 이완용의 총리 권한을 대행하였다 .
경술국치로 나라를 팔아먹은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람을 즐기다 1916년에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역시 조약 체결후에는 한국 민중들의 분노를 사서 표적이 되고 습격도 받았지만 전부 살아남았다고 한다...
조중응
양반가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했던 조중응은 1880년대에는 고종에게 경서(유학책을 권함)를 하기도 했다 .
일찍이 개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여행했고 북방남개론을 주장하기도 했었다.
북쪽은 막고 남쪽은 열어야 한다는거다 즉 반러시아 성향에 친일파였다 이것때문에 반일성향의 여흥민씨들에게 찍혀 호남으로 유배를 갔었다.
이후 청일전쟁(1894년)에서 의친와이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오는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친일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바로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비를 죽이는데 가담한것이다, 이후 고종이 쫄아서 아관파천을 하자 친일 내각이 붕괴하자
잠시 일본으로 피신하여 10여년동안 망명생활을 하였고 1906년쯤에 귀국하여 이완용의 총명을 받으며 법부대신으로 단숨에 출세하였다.
그리고 정미조약(1907)으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는데 참여했으며 1910년에는 나라팔아먹는데도 일조하였다. 그리고 계속 친일파로 살다 죽었다.
이병무
이병무는 정종의 서자였던 무림군의 후손으로 1894년 늦은시기에 정계에 진출했다.
그는 처음에는 평범했지만 의친왕을 따라 일본 순방에 갔다 친일파가 되어서 돌아왔다.
1895년 그는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파견을 가 공부하여 한국으로 돌아와 육군무관학교의 교장으로 지냈다.
하지만 친일행위로 2년간 구금을 당했고 1900년도에는 유배를 가기도 했다.
그러다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그는 다시 돌아왔고 이후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 시켰고
이후에는 정미칠적으로 고종이 보는앞에서 자기 목에다 칼을 대면서 자결할듯이 고종의 퇴위 문제로 협박했다.
후에는 친위부를 창설하고 친위대신으로 지내다 일본군으로 편입되었고 최종 계급은 중장까지 올라갔다 경술국치 후 자작 지위를 받아 나라팔아먹은걸 아주 만세상에 자랑하며 떳떳하게 살다 1926년에 죽었다 참고로 순종도 이때 붕어하였다.
조민희
1885년에 정계에 진출하였다 한때는 외교관으로 주미공사와 주일공사로 지낸적도 있었다.
이후 1907년에는 평리원 재판장에 임명되어 헤이그 밀사사건을 처리하였고
경술국치때는 고종과 관련된 업무를 맡았던 승녕부 총관을 지내고 있었고 역시 나라를 팔아먹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하지만 한일병탄의 공을 인정받아 막대한 은사금은 잘 관리를 못해 파산해 빚에 쫓기며 살았다 .
이용직
번외로 나라는 팔지 않았지만 친일파였던 이용직이 있다 아쉽게도 사진이나 그림도 남아있지 않다.
경술국치 당시 학부대신의 위치에 있었으며 병탄에 대해 소극적으로 나서며 오히려 저항하였다.
하지만 물량은 못이기는지라 계속되는 강요속에 그는 "x까 시발 절대 못해" 하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갔다.
이렇게 보면 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해 저항했던 정말 마지막 충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용직은 매국에 미친 이완용을 대놓고 디스했는데 "칼침을 그렇게 맞고 싶으시면 니 혼자 맞으세요, 난 싫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그는 매국만 안했을뿐이지 엄연히 친일파였다 일본이 조직한 친일 어용 유림조직이였던 공자교회에서 활동했었다.
또 경술국치 이후에는 끝까지 저항하지 않고 내려준 작위를 받았다가 3.1운동때는 김윤식과 함께 일본에게 독립 청원서를 제출했다 작위를 박탈당했다.
위에 8명의 쓰레기들과 다르게 친일은 하였어도 나라는 팔지 않고 오히려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하는 모습때문에 그렇게 나쁜 이미지는 없다.
이재명
그는 매국노였던 이완용 암살을 시도하였다 사형당한 독립투사다.
1904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1907년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1909년 순종과 이토 히로부미가 함께 평양을 방문하자
암살을 계획했지만 안창호가 말려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손에 죽자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등 내부의 적을 죽이겠다며 결심하였다 그중 이완용을 맡았다, (이용구는 김정익이 송병준은 이동수가 맡았다)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군밤장수르 변항하고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던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를 3차례나 찌르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달려와 부상당했던 이완용은 서둘러 빠져나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이재명은 붙잡혔다
당시 사건을 적은 신문 보도다
재판장에서 이재명은 일본인 재판장이 "너같이 흉행한놈은 몇이나 되는가?" 라는 질문에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놈아 너는 흉자만 알고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닌 의행을 한것이다" 라고 고함을 쳤다
이에 당황한 재판장이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라는 질문에 "2천만이다" 라고 당시 모든 민중을 거론하였다
이에 창밖에서 "옳소!"라는 흥분 소리와 방청객들이 유리를 부수고 들어올라고 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야만 왜종들을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라고 고함을 쳤다
이런게 진정한 상남자 아닌가 싶다. 너무 멋있다.
그리고 1910년 9월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비록 이완용을 죽이진 못했지만 그가 찌른 칼날의 화근이 되어 이완용은
폐렴으로 고통스럽게 괴로워 하다 죽었다 그리고 이재명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이상 쓰레기 8명과 마지막 충신 그리고 구한말 독립투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길었지만 봐줘서 고마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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